해외 매각 및 기술·인력 유출 가능성에 우려 목소리 여전
고려아연의 자사주 공개매수가 지난 23일 종료됐다. 이로써 경영권 분쟁의 1막도 내렸다. 영풍과 MBK파트너스 연합이 지분 우위를 차지했지만, 양측 모두 과반 지분을 확보하지 못하면서 팽팽한 접전을 이어가게 됐다. 앞으로 열릴 주주총회 대비 의결권 확대가 2막의 핵심이다. 각오는 비장했다. 경영권 방어를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강구한다는 게 회사 측 입장이다.|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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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권 수성에 나선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이 지난 2일 기자회견을 통해 "이번 위기를 새로운 변화와 도약의 기회로 삼겠다"고 각오를 전했다. 사진=뉴시스 |
[CWN 소미연 기자] 고려아연은 경영권 분쟁이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40여일 동안 총 세 차례의 기자회견을 열었다. 지난 40년간 회사의 성장사와 함께해 온 최고기술책임자(CTO) 이제중 부회장(9월 23일)이 적대적 인수합병(M&A)에 대한 우려와 비통한 심정을 토로한 데 이어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는 최윤범 회장(10월 2일)이 자사주 공개매수 추진 계획과 난관 극복에 대한 각오를 밝히며 국민적 지지를 호소했다. 자사주 공개매수 종료를 하루 앞두고 등판한 박기덕 사장(10월 22일)은 향후 대응에 대한 자신감을 피력하며 법적 공방을 예고했다.
경영권 위기에 고려아연 임직원들은 울분을 숨기지 않았다. 영풍·MBK 연합의 기습적인 공개매수가 충격적인데다 '기업사냥꾼'으로 불리는 사모펀드 운용사 MBK와 손잡은 영풍에 대한 실망이 크다. 이로써 고려아연과 영풍의 동업 관계도 종지부를 찍게 됐다. 영풍그룹 핵심 계열사인 고려아연은 고(故) 장병희·최기호 창업주가 1974년 공동 설립한 회사로, 그간 최씨 일가가 경영을 담당해왔다. 장씨 일가는 영풍그룹과 전자 계열을 맡았다. 하지만 이번 경영권 분쟁으로 양가 후손들도 완전한 결별을 맞게 됐다.
실제 분쟁이 격화되면서 양가의 갈등도 노골화됐다. 사태 촉발의 책임을 두고 영풍·MBK 연합은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을, 고려아연 측은 장형진 영풍 고문을 지목한 것이다. 영풍·MBK 연합은 공개매수를 통해 고려아연 경영권을 확보하려는 이유로 최 회장의 전횡, 이에 따른 투자 실패 및 재무건전성 악화, 기업가치 훼손을 주장했다. 지배구조 개선으로 경영 정상화를 견인하겠다는 게 이번 공개매수의 목표다. 특히 강성두 영풍 사장은 고려아연의 황산취급대행계약 갱신 거절 통보를 결정적 계기로 꼽으며 양사 상생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강조했다.
고려아연은 적극 반박했다. 지난 25년 동안 98분기 연속 흑자 시현, 2019년부터 2023년까지 매년 평균 약 1조2000억원의 EBITDA(법인세·이자·감가상각비 차감 전 영업이익) 달성, 현재 AA+ 신용등급 유지, 국내 최고 수준의 주주환원율(2017년 27%→2023년 76%)이 수익성·안정성에 이상 없다는 증거다. 올해 6월 말 연결기준 부채비율은 36%, 차입의존도는 10%다. 통상 부채비율 100% 이하, 차입금의존도 30% 이하면 재무건전성이 우량한 것으로 판단하는 만큼 경영 악화로 보기 어렵다. 고려아연은 전 세계 제련소의 연평균 영업이익률(2~3%)보다 약 3배 높은 8~10% 수준이다.
회사에 손실을 입힌 것으로 지적된 원아시아파트너스 운용 펀드 투자(배임 의혹), 미국 전자폐기물 재활용 기업 '이그니오홀딩스' 인수(고가 인수 의혹)는 투자 의사 결정 과정에서 관련 법령 및 내규에 따라 필요한 절차를 모두 거친 정상적·합리적 경영 판단이라고 주장했다. 더구나 블라인드 펀드는 어느 사업에 투자를 집행하는지 LP(출자자)는 관여할 수 없는 만큼 원아시아파트너스 투자로 불거진 SM엔터테인먼트 시세조종 관여 의혹은 사실이 아니라는 입장을 밝혔다. 또 이그니오홀딩스는 고려아연의 '트로이카 드라이브' 사업 추진에 중요한 한 축으로, 신성장동력 확보를 위한 미래 투자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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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아연 성장 역사의 산증인으로 불리는 이제중 부회장이 지난 9월 23일 기자회견을 자처해 "50년 동안 피와 땀으로 일궈 온 회사를 지키고 싶다"며 "모든 임직원들은 현 경영진과 함께 할 것"이라고 밝혔다. 사진=뉴시스 |
고려아연은 트로이카 드라이브 전략을 통해 기존의 전통적인 제련 사업 분야에서의 경쟁력을 바탕으로 이차전지소재, 자원순환(폐배터리 리싸이클링), 신재생에너지를 3대 신사업으로 추진 중이다. 오는 2033년까지 신사업 매출로 12조2000억원을 확보하는 게 목표다. 같은 해 제련 사업(13조원) 매출을 더해 연매출 총액 25조원 달성을 노린다. 이는 향후 10년간(2023~2033) 연평균 성장률 10%에 달하는 수준이다. 회사 안팎으로 기대감은 높다. 최 회장의 말처럼 "제2 도약의 로드맵이자 첫걸음이 될 것"이라는데 이견이 없다.
이에 따라 노조부터 기술진까지 고려아연의 전 임직원들은 현 경영진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장기적인 안목, 글로벌 네트워크, 축적된 산업 전문성과 경영 노하우가 회사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이끌 핵심 경쟁력이라 판단했다. 특히 이 부회장은 최 회장에 대해 "미국 변호사이기도 하지만 한국에 돌아온 뒤 온산제련소에서 1년간 현장 실습을 받은 전문가"라면서 "호주 SMC 제련소 사장으로 부임해 만년 적자 공장을 흑자로 전환시킨 점을 보면 기술과 전문 경영 역량을 모두 갖췄다"고 평가했다. 반면 영풍 경영진에 대해선 날을 세웠다. 기자회견 당시 이 부회장은 장 고문을 겨냥해 '부끄럽지도 않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실제 영풍의 상황은 녹록지 못하다. 석포제련소 폐수 유출 관련 조업정지로 대법원 상고심이 진행 중인데, 대표이사 2명은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혐의로 구속돼 자리에 없다. 이들을 제외한 3명의 비상근 사외이사 중심의 비상경영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뿐만 아니다. 대규모 적자로 올 2분기 기준 공장 가동률이 58.4%까지 추락했다. 사업 발전성은 물론 오너 일가의 경영 능력에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박 사장은 "실패한 기업이 고려아연의 지배구조를 개선하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강조했다. 이 부회장을 비롯한 핵심 기술진들은 영풍·MBK 연합에 경영권이 넘어갈 경우 전원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배수진을 쳤다.
영풍·MBK 연합은 고려아연 경영을 전문경영인에게 맡기되 현 고용 체제와 신사업 추진을 이어가겠다는 입장을 내놨다. 아울러 향후 10년간 매각하지 않겠다며 먹튀 가능성에 선을 그었다. 하지만 우려의 목소리는 여전하다. 10년 후 미래를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풍은 1대 주주의 자리를 MBK에 양보했다. 영풍이 보유한 고려아연 지분 일부를 사서 최대주주(지분 50%+1주)에 오를 수 있는 콜옵션을 MBK에 부여한 것. 이를 두고 강 사장은 "고려아연을 살리기 위한 고육지책"이라고 말했다. 영풍이 보유한 자산 가운데 가장 가치가 높은 고려아연 지분을 매각하는 중대한 결정에 주주총회 특별결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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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덕 고려아연 사장이 지난 22일 기자회견을 열고 공개매수로 영풍·MBK 연합에서 확보한 지분은 비정상적 유인 거래에 따른 결과라며 '원천 무효'를 주장했다. 사진=뉴시스 |
정치권과 지자체는 고려아연의 손을 들어줬다. MBK가 국내 1세대 사모펀드로 금융당국의 감독을 받는다 하더라도 속성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판단에서다. 사모펀드는 싼값에 기업 경영권을 확보해 배당을 챙기고, 기업가치를 키워 매입가보다 높은 가격에 재매각해 차익을 얻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이에 따라 인수 후 연구개발(R&D) 투자 축소, 해외 매각 시도 가능성이 뒤따랐다. 이 같은 우려는 올해 국회 국정감사에서도 제기됐다. 김광일 MBK파트너스 부회장이 증인으로 출석한 정무위원회 국감에서 이헌승 국민의힘 의원과 박상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ING생명, 홈플러스, BHC 등 MBK가 인수한 기업을 언급하며 "그동안 행태를 보면 신뢰하기 어렵다"고 한목소리로 비판했다.
박 의원은 MBK의 말바꾸기를 지적했다. 과거 기업 인수 당시 공언한 것과 달리 구조조정에 나선 점, 이번 고려아연 공개매수에서도 가격 인상 가능성이 없다고 하고선 결국 가격을 올린 점을 꼬집었다. 문제는 고려아연 경영권 확보 이후다. 이 의원은 "세계 1위 제련 기술이 중국 등 다른 나라로 팔리면 심각한 국부 유출이 될 수 있고 포스코, 현대, LG 등 국내 다른 기업도 타격을 받아 국가 경제까지 휘청거릴 수 있다"며 해외 매각 가능성을 우려했다. 온산제련소가 위치한 울산 지자체에서 '고려아연 지키기'에 나선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다. 앞서 울산시와 울산시의회는 이번 사태에 좌시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알렸다.
고려아연은 세계 1위 비철금속 제련 기업으로, 국가기간산업을 뒷받침한다. 주력으로 생산하는 아연은 철과 함께 '산업의 쌀'로 불리고, 아연과 연의 제련 과정에서 회수되는 금, 은, 동, 황산 등은 전자·반도체와 같은 국내 첨단산업의 기초 소재다. 반도체 공정에서 필요한 황산의 경우 국내 생산량의 65%를 차지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주요 고객사다. 뿐만 아니다. 희소금속인 인듐은 사실상 국내 유일 공급 업체로, 전 세계에서 필요로 하는 물량의 11%를 책임지고 있다. 이차전지 양극재의 핵심 소재 중 하나인 코발트도 생산한다. 공급망 안정화에서 고려아연의 역할을 고려하면, 이번 경영권 분쟁은 기업 간 단순한 다툼으로 보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업계에서도 "기업 경쟁력 약화를 넘어 국가기간산업의 핵심 기술과 미래 기술 안보에 관한 문제"라고 설명했다.
고려아연은 '사업보국(事業報國)'을 약속했다.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해 지역사회와 함께 성장하고, 국가 경제에 기여하는 든든한 국민기업으로 거듭나겠다는 게 최 회장의 각오다. 최 회장은 "고려아연을 저 개인의 전횡이나 사유화의 수단으로 몰아가는 것은 지난 50년, 현재도 고려아연을 위해 헌신하는 임직원들과 이사회를 모욕하는 것이다"면서 "저를 포함한 경영진은 모든 의사결정과 그 결과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지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앞서 고려아연 이사회는 약 2조7000억원 규모의 자사주 공개매수를 추진, 취득한 자사주는 전량 소각하기로 결정했다.
CWN 소미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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