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물질적인 것과 보이는 것이 중요한 시대이다. “실용주의”는 현 정부의 화두가 되었다. 국민들은 불필요한 언쟁과 담론들보다는 자신들의 생활에 한걸음이라도 가까운 정책 방향에 반가워하고 있다. 중요하지도 않은 사건들과 정쟁에 정신을 팔기보다는 실제 발생한 문제해결에 국가적 역량을 집중하겠다는 것은 모두가 환영할 일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 ‘실용’으로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가치를 제시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실용’은 일종의 방법론적 태도에 해당한다. 우리의 목표와 가치에 따라 실천하고 노력하는 방법론을 의미한다. 우리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주체들이 제각각의 목표를 위해 자신들을 위한 ‘실용’을 추구한다면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고, 일정 수준을 넘으면 ‘실용’으로서는 더 이상 해결할 수 없는 가치와 의미의 충돌 영역에 들어가고야 만다. 함께 대화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적대만 남는다면 실용은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또한, 가치와 의미의 통합된 원칙에 기반하지 않는 실용은 권력자의 편의주의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세계 정치가 ‘동물적인 힘’을 과시하는 장소가 되어가고 보편적 가치는 물론 목표조차 찾지 못하고 있는 지금, 우리는 우리 아이들에게조차 윤리적 기준도 사회적 공동선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상대방을 설득하기는커녕 자신 스스로가 격랑 속에 휩쓸리는 부표처럼 흔들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폭력적인 독재정치를 계엄을 통해 획득하려던 윤석열과 그 집단들을 막아내고 징벌하는 데는 성공했을지 모르나, 그들과 아직도 그들을 옹호하는 일부 국민들을 설득하고 그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행위를 부끄럽게 반성할 수 있게 하는 기준을 확립하지는 못했다. 우리 사회의 무시할 수 없는 일부가 단지 ‘운이 없어서 졌을 뿐’이라고 생각한다면, 복수를 꿈꾸는 자들을 통해 언제 어디서 ‘역사의 반동’이 일어날지 모른다. 우리 사회가 적과 친구를 구분해서 적을 처단하는 극단적인 신정정치의 체제가 아니라면, 더군다나 전 세계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청년 세대의 보수화 및 극우화가 한국 사회에서도 이미 심각할 정도로 현실화되고 있는 상황이라면, 더 늦기 전에 우리 사회의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이념적 틀을 확립하고 전파하고 실천해야 한다. 이 이념적 틀은 사회적 고통과 구체적인 노동 현장에서의 목소리들에 기반하고 있어야 한다. 국가 숭배와 시민종교 따위가 들어설 곳이 아니다. 이 이념은 오직 민중을 통해, 민중과 함께, 민중 안에서만 나올 수 있다. 이제 제대로 된 질문을 할 때가 되었다. 우리에게 역사철학은 가능한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하나로 연결하는 이야기가 가능한가? 이 땅의 지식인들은 새로운 역사철학, 과학적 회의를 포용할 수 있는 새로운 합치를 만들어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몸과 정신을 가진 양서류와 같은 생명체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환경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한다. 생명체의 이러한 상호작용이야말로, 시간 속에 존재하는 생명체의 패턴이며, 이를 생명체의 시간적 컨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동식물의 형태와 유전, 성장과 분화는 계속되는 정보전달과 메시지를 만드는 물질적 재료의 변형이고, 그러한 행위들의 집합인 시간적 컨텍스트는 확장되고 분화해 간다. 이러한 진화의 과정을 통해 생명체가 환경과 같은 외적 조건을 내면화함으로써, 무기물과 같이 그냥 주어져 있는 상태인 안정성으로서의 존재 양태로부터 계속해서 새롭게 자신의 안정성을 이루어내야 하는 양태로 전환된다. 생명체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이루어내야 하는 존재로 전환되는 것이다. 이 내면화로의 전환과 함께 정신이라는 것이 나타나고, 정신의 영역에서 스스로의 행위를 판단하는 가치와 의미가 발생한다.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것은 정신의 영역에 나타난, 인류라는 종이 쌓아온 시간적 컨텍스트의 결과물이다. 존재하고 존재했던 인간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가치와 의미가 생성되고 소멸되고 연결되면서, 우리의 행위를 지시하고 반성하는 통합적이고 필연적인 가치와 의미의 망이 형성된다. 수학적 체계처럼 가치와 의미의 체계도 자체의 통합성과 필연성을 갖추고 있다. 혹은 우리가 수학적 체계를 통일적이고 필연적으로 구성하기 위한 노력을 끊이지 않는 것처럼, 가치와 의미의 체계를 통합적이고 필연성을 갖출 수 있도록 끊임없이 재구성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인류의 역사와 문화는, 물질적인 생산과 노동의 역사와 함께 정신의 영역에서 가치와 의미의 체계를 끊임없이 재구성하는 역사에 다름 아닌 것이다. 한 개인이 행동하는 것은 자신이 가진 가치와 의미의 망 속에서의 판단을 통해서이다. 건강한 도덕적 신념 체계는 강력한 통합성과 필연성을 갖추고 있다. 한 개인이 하는 각각의 판단들이 일관성이 있도록 서로를 지지하고 연결해준다. 역사가 아무리 사실들의 집합을 통해서 서술된다고 하더라도 가치와 의미의 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역사과학의 회의적 사고를 포용하고 경험과 사유의 틈새를 메우는 새로운 합치, 즉 과거⸱현재⸱미래를 연결하는 하나의 이야기, 역사철학이 필요하다. 개인에게도, 집단과 조직에게도, 국가에도, 인류와 세계에도 각자의 이야기들이 구성될 수 있다. 아주 낮은 시시한 이야기에서부터 역사의 종언을 만드는 이야기까지. 초라한 기원과 미약한 최후를 가진 하나의 이야기인 “똑-딱”이 있고, 역사와 함께 시작한 구원하는 폭력과 희생자 기제의 종결, 비폭력 투쟁을 통한 지배사회의 폐지, 권세와의 투쟁과 구원을 종말론적 사명으로 하는 인류사적 차원의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들은 과학적 회의를 통과해야 하며 전체로서 역사철학의 통합성과 필연성을 갖출 수 있어야 한다. 서로 간에 충돌하고 분산적이고 산발적이라면, 행위자들은 좌충우돌하고 서로 간에 갈등할 것이다. 마치 ‘하나의 정신’인 것처럼 활동하는 역사적 주체는, 강력하게 통합적이고 필연적인 가치와 의미의 망에 기반한 역사철학을 필요로 한다.
우리의 역사철학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어떤 역사철학이 필요한 지는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우리의 역사철학은 이 땅의 민중을 통하여, 민중과 함께, 민중 안에서 구성되어야 한다. 이 역사철학은 도래할 민중, ‘하느님 나라의 백성’들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지배자의 나라가 아니라 민중의 나라를 추구했던 민중적 사건과 계기들이 시작점이 되어야 한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야말로 남북한의 두 근대 국가에게 필요한 역사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 둘째, 우리의 역사철학은 민주주의를 이념, 절차, 정부형태, 정부체제가 아니라 민주적 제도의 도입을 위한 지속적 탐구와 투쟁이 역사를 통해 축적된 제도적 결과물이자 집합체로 본다. 이념으로서 민주주의는 현실의 민주주의가 무한히 접근해가는 점근선과 같다. 그러나 이 점근선 역시 고정된 직선이 아니라 경제사회구조와 인류의 문화적 진화에 따라 그리고 인류를 둘러싼 자연환경과 생물권의 변화에 따라 변하고 있다. 따라서 민주적 제도의 집합체로서 민주주의는 끊임없이 갱신되어야 한다. 특히, 기술의 발전은 경제사회구조를 급격하게 변화시키는 민주주의의 위기 요소이며, 사회와 개인의 구성원리를 변화시키는 종교와 철학의 변화와 발전 또한 조직의 유형과 구성을 변화시킴으로써 민주주의에 위기를 초래한다. 현재의 민주주의는 역사상 발생했던 이러한 위기들을 극복해 온 방식들의 축적이다. 셋째, 진보적 역사철학은 종말론적이고, 역사적 목표와 구체적 제도와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종말론적 관점에서 바라볼 때에만, 세상이 흘러가는 과정이 통일된 하나의 단위로 보일 수 있다. 여기에 근거한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역사 해석이 각 개인의 강력한 정서와 결합할 때 실천철학으로 전환될 수 있다. 넷째, 역사철학은 통합적이고 필연성과 일관성을 갖춘 가치와 의미의 망에 기반하고 있어야 하고, 과학적 회의와 각 분과 학문의 결과들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적어도 현재 시점에서 비폭력 투쟁과 평화, 자유⸱창조⸱연대를 위한 공간으로써 시민사회의 확장과 발전 등은 우리의 역사철학을 위한 핵심적인 가치가 될 수 있다.
역사철학은 하나의 이야기이다. 경험과 사유의 빈틈들을 메우고 고유의 형식으로 위안을 주는 허구이다. 거짓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것에 대한 이야기라는 차원에서 허구이다. 인간은 허구를 통해 자유롭다고 느끼며, 인간의 상상력은 “있지 않은 것을 보는 능력”으로 질서와 합치를 역사철학이라는 형식을 통해 생산해 낸다. 이 형식은 위안을 주기도 하고, 실존의 고뇌를 완화해 주기도 하고,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려는 소망의 근거를 만들어 주기도 한다. 우리는 언어를 익히듯이 형식을 익히고, 형식과 합작하여 세상과 대면한다. 우리는 영속적인 위기와 모순된 현실 세계 속에서, 아마도 우리 자신으로 인해 발생한 생태적 파국과 국가 간 전쟁위기 등이 무르익은 때에, 과거와 미래에 대한 현기증 나는 전망을 안고 살고 있다. 그러한 혼돈과 부조리는 우리가 쉽게 견디기 힘든 것이다. 이러한 전망에 질서를 주는 것만으로도, 아편처럼 위안을 제공하는 기능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역사철학이라는 허구를 원하는 까닭은 지금 여기 한가운데에서 냉엄한 진실을 발견하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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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 과학기술평가예측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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